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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 article 2013/10/01  
         name          이대
subject 18세기의 책 마니아 이덕무

18세기의 책 마니아 이덕무


※ 오랜만에 노란색 게시판에 올리는 이 글은, 잡지교육원 3개월 교육과정을 마무리하며 '교육원생들의 잡지를 만들자'하는 기획으로 만들게 된 잡지 <마니아>에 실릴 글이다.
이 기획 잡지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하자면 일단 잡지의 주제는, 제호를 보면 눈치챌 수 있겠지만, 서른 두 명 교육생들의 토의를 통해 '마니아'로 정해졌다. 주제를 정한 후 교육생 각자가 어떤 소주제들, 다시 말해 '마니아'라는 주제에 대한 어떤 기사를 쓸 것인지 기획안을 제출하고 그것들을 취사선택해 각자가 쓸 기사가 정해졌는데 대개는 자신이 제출한 기획안에 있던 기사를 쓰는 것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내가 맡은 이 이덕무에 대한 기사는, 내가 낸 기획안에 있던 주제가 아닌, 강사님이자 잡지계의 선배님이신 유정서 선생님이 제안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 선생님께서 제안한 주제를 내가 한 번 기사로 작성해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내가 이 주제에 대한 기사를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학교에서 국문과 수업을 들으며,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과 같은 소위 '백탑파' 실학자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언젠가는 그들에 대한 공부를 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둘째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 약점인 <정보 탐색과 수집에 젬병이라는 것>에 대해, 그것이 정말로 내가 가진 부족한 부분인 건지 한 번 확인해 보고자 하는 이유가 두번째였다.
무튼 그래서 작성했던 기사 글인데, 주제가 주제인 만큼 마치 학교에서 레포트를 쓰는 느낌으로 썼던 것 같다. 레포트의 학점은 잘 모르겠지만.


*   *   *


[Mania in History]


18세기의 책 마니아
간서치 이덕무



花不可以無蝶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山不可以無泉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 된다.
石不可以無苔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水不可以無藻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喬木不可以無藤蘿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 되고
人不可以無癖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 된다.
                                  - 청나라 문인 장호(張湖)


벽(癖)이라는 글자에 대해 알고 있는가. 병들어 기댄다는 뜻의 녁(疒)자를 부수로 하는 이 글자는 무엇에 대한 기호가 지나쳐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가 된 것을 뜻한다. 18세기의 조선에는 담배를 유난히 좋아했던 이옥, 비둘기 사육에 관심이 깊던 유득공, 벼루를 잘 깎기로 이름난 정철조, 다독의 마니아 김득신 등 이 벽이라는 글자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인물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책에 대한 벽이 있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간서치(看書癡)’ 즉 책만 읽는 바보라고 불렸던 이가 있으니 이덕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
이덕무는 책만 보는 바보라는 별명에 걸맞게 어려서부터 책 읽기에 대한 집착이 병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문리(文理)를 얻은 6세 이후 21세가 되기까지 단 하루도 고서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이전까지 읽어보지 못한 책을 만나면 그는 기쁜 마음에 웃었는데 집안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보면 그가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았다고 한다. 어느 날은 집안사람들이 그가 보이지 않아 사방팔방으로 찾아다닌 일이 있었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대청 벽 뒤 풀 더미 속에서 겨우 찾을 수 있었는데 어린 이덕무는 벽을 도배할 때 바른 옛 책을 보는 데 정신을 빼앗겨 날이 저문 줄도 몰랐던 것이다.

젊은 날의 이덕무는 그야말로 지독한 책벌레였다. 풍열로 눈병에 걸려 눈을 뜰 수 없는 중에서도 어렵사리 실눈을 뜨고 책을 읽었고 열 손가락이 다 동상에 걸려 손가락 끝이 밤톨만하게 부어올라 피가 터질 지경에도 주변 친구들에게 책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는 늘 남에게 책을 빌려 보았는데 그렇게 빌려 한 권의 책을 얻으면 기뻐하며 읽었고, 또 중요한 부분을 만나면 베껴 적었다. 이렇게 평생 동안 읽은 책이 수만 권이었고 매우 작은 글씨로 베낀 책만 수백 권이었다. 외출을 하더라도 옷소매 속에 책을 넣고 다녔으며, 붓과 벼루까지 함께 지니고 다녔다. 주막에 머무르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일찍이 책을 덮은 적이 없었다. 집에는 책이 별로 없었으나 따지고 보면 책을 쌓아 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어째서 그토록 책 읽기에 집착했던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그의 신분에 따른 생활의 막막함도 그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서얼 신분의 막막함
이덕무는 1741년 통덕랑 이성호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얼(첩의 자손)로 태어난 그는 당시 조선시대의 관습에 따라 재산 상속권이 없었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도 없어 관직에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분에 따른 처참한 가난은 그의 천명이었다. 책을 많이 읽는다 해도 과거를 볼 수 없으니 딱히 써먹을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덕무는 책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을유년(1765년)겨울, 이덕무는 난방이 안 되는 서재에서 덜덜 떨며 글을 읽다가 얼어 죽을 것만 같아서 하는 수 없이 한 칸짜리 초가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그곳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벽에 얼음이 얼어 거울처럼 얼굴을 비추고 날이 풀리면 누런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집이었다. 그 집에서도 그는 어린 아우와 함께 책만 읽었다. 하루는 초가집에서 홑이불만 덥고 잠을 자다가 아무래도 얼어 죽을 것만 같아 벌떡 일어나 <논어>를 병풍처럼 늘어세워 웃풍을 막고, <한서>를 이불 위로 덮고서야 겨우 얼어 죽기를 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생활의 어려움과 신분의 한계에 따른 답답함을 이덕무는 책읽기로 해소했다. 지독한 슬픔이 닥치더라도 두 눈이 있어 글자를 배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행운으로 생각하며, 한 권의 책을 들고 슬픈 마음을 위로했다. 책읽기와 글쓰기는 그가 세상을 향해 답답한 마음을 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구멍과도 같았다.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다
가난한 삶에도 책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던 이덕무였지만 서얼 신분의 한계와 계속된 생활의 어려움은 그를 흔들었다.

이덕무는 벗인 이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친구이자 그 역시 서얼이었던 유득공과 집에 있는 것 중 가장 비싼 서적 <맹자>를 팔아 밥을 지어 배고픔을 해결하고 <좌씨전>을 팔아 술을 마신 이야기를 하며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학자)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술잔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하며 박장대소했다는 자조적이고 또 한편으론 조용한 분노가 담긴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편지에는 평생 글을 읽어봐야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던 서얼들의 신분적 한계와 생활의 어려움에 대한 비애가 자조적으로 담겨 있었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끝없이 노력한 덕일까. 이러한 자조와 분개에서 벗어나 이덕무는 드디어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에 의해서였다. 1777년 정조는 서얼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정유절목’을 발표한 뒤 1779년 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워 문장에 뛰어난 학자들을 등용한다. 이 때 이덕무를 초대 검서관 중 한 명으로 임명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덕무의 식견과 지식을 아끼던 주변 벗들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이덕무를 검서관으로 채용한 정조는 그를 특별히 아꼈다. 이덕무의 책 읽는 소리를 좋아하여 임금 앞이라 자꾸 소리를 낮추는 그에게 자주 음성을 높일 것을 주문하였고, 책 교정 말고 스스로의 저작을 남길 것을 격려하여 그를 감격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가 관직에 있었던 15년 동안 모두 520여 차례에 걸쳐 하사품을 내렸다. 후에 그가 세상을 뜨자 아들 광규에게 아버지의 벼슬을 그대로 내렸으며 아들을 시켜 국가의 돈으로 그의 문집을 간행케 하여 <청장관전서>를 편찬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끈질긴 독서가 그렇게 무기력한 것만은 아니었다.

벽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일 뿐
이덕무에게 맡겨진 검서관의 일이란 규장각의 문서정리와 자료조사 같은 단순 작업이었다. 책을 교정하는 작업도 했다. 하루 5천 자도 넘는 글을 쓰느라 손이 마비될 지경에 이를 만큼 힘든 날을 보냈다. 이처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이덕무가 남긴 12종 책의 분량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그가 남긴 <이목구심서>는 당시 박지원과 박제가 등이 여러 번 빌려가 자기 글에 수도 없이 인용한 책이며, 당시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친구였던 연암 박지원의 기문(奇文) 열 편을 뽑아 비평을 하고 서문을 달아 <종북소선>이라는 서적도 엮어냈다. 뿐만 아니라 무예 훈련 교범으로 당시 조선시대의 무예와 병기에 관하여 종합적인 조감을 할 수 있는 <무예도보통지>도 박제가, 백동수와 함께 지었다.

가까운 벗이었던 박제가는, 무릇 벽이 없는 사람이란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덕무는 알아주는 이 없고 알아줄 기약도 없는 막막함 속에서도 책 읽기와 글쓰기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그에 힘입어 벼슬에 나가 해박한 지식과 지적인 편력으로 후대에 충분히 모범이 될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이덕무는 그야말로 쓸모 있는 사람, 진정한 책 마니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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