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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 article 2012/07/12  
         name          이대
subject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오랜만에 재민이와 한 번 보기로 했다. 연락하니 재민이는 계절학기를 들으러 학교에 오고 수업은 오후 네 시쯤 끝난더랬다. 재민이에게 연락했던 시간은 오후 열두 시 이 분 이었다. 연락을 마치고 중앙도서관에 가 책을 좀 읽다가 한 시 반쯤 점심을 먹고 돌아오던 참이었다. 어느 길에선가 별안간 문득 이 문장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이 문장은 중학교 시절 한참 빠져 읽던 도스또예프스끼의… 하고 문장이 이어진다면 포스트 하루키 쯤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아쉽지만 그건 아니고, 실은 중학교 시절 한참 정말이지 푹 빠져 읽던 이영도의 판타지 소설인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한 문장이었다.

<드래곤 라자>는 말하자면 우리나라 판타지 소설의 초석이자 흔들리지 않는 대들보라고 할 수 있을 작품인데 이 소설은 판타지 소설 작법의 기초라고 할 수 있을, 작가가 창조해 낸 새로운 세계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실 판타지 소설이란 작가가 만든 세계관의 완성도가 곧 소설의 완성도라고 할 수 있으며 세계관의 완성도를 소설로서 증명해 내는 것이 곧 판타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법도 한데 지금 이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
여하튼 <드래곤 라자>의 세계관에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는데 조화와 저울의 유피넬, 혼돈과 추의 헬카네스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그 신들을 모시는 성직자들은 그들 나름의 인사말을 가지고 있다.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이란 바로 호비트와 갈림길의 신인 테페리 신자들의 인사말인 것이었다.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이 문장을 해석하자면, 당신의 마음이 원하는 길은 죽 곧은 길이 될 것이다, 라는 문장이 될 테다.

중학교 시절 읽었던 책의 한 문장. 그리고 당연하게도 먼지 쌓인 기억 속에서 바래고 바래 흐릿해졌을 저 문장이 재민이와의 통화를 마친 뒤 머릿속 기억의 수면 위로 불쑥 떠오른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생각할 것도 별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재민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저 문장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부모님이 원하시고 어쩌면 세상도 원하고 있을지 모를 취업의 길을 걷어차 버리고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음악의 길로 이제 막 제대로 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재민이에게 말이다. 재민아,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은 어쩌면 혹은 물론 고달픈 길이 될지 몰라. 하지만 그 길의 종반부에서 네가 온 길을 뒤돌아 바라보면 넌 절대로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닌 죽 곧은, 바른 길을 걸어왔음을 확인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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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문장이 떠오르자 마자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책갈피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시간은 오후 두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약속 시간인 네 시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그래도 머릿속에 책갈피의 구상은 끝났으니 완성도는 둘째 치고라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앞면에는 기타와 재민이의 별명을 넣고 뒷면에는 곧은 길의 그림과 테페리의 인사말을 넣고. 오후 세 시 사십 분쯤 간신히 마쳐 근처 인쇄소로 달려가(실은 버스를 타고) 코팅을 했다. 그러고는 아일렛 펀치로 구멍을 뚫고 아일렛을 끼워 끈을 달았다.

재민이를 만난 곳은 이제는 텅 비어 버린 재민이의 집이었다. 재민이를 도와 집 안에 남아 있는 잡다한 쓰레기들과 먼지들을 빗자루로 쓸어 쓰레기봉투에 집어 넣고 재민이의 이사 마무리를 거들었다. 여러 개의 쓰레기봉투를 건물 밖으로 가져다 놓으며 재민이는 밖에서 현관문을 닫았다.
책갈피를 건넨 것은 날씨가 한참이나 더워 음료를 마시러 들어간 카페에서였다. 책갈피를 받고 좋아하는 재민이에게 <드래곤 라자>와 테페리의 인사말에 대한 설명을 잠깐 이야기해 주었다. 기타를 그리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는데 재민이는 기타 그리기의 어려움에 대해 공감을 했다. 그러고는 얼마간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헤어졌다. 그런데 헤어지고 나서 걷고 있자니 문득 한가지 생각이 더 들었다. 이런 생각이었다, 재민이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란 재민이 뿐 아니라 내가 나에게도 해 주고 싶은 말이었구나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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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민아,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은 어쩌면 혹은 물론 고달픈 길이 될지 몰라. 하지만 그 길의 종반부에서 네가 온 길을 뒤돌아 바라보면 넌 절대로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닌 죽 곧은, 바른 길을 걸어왔음을 확인하게 될 거야.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거야.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이대 2012/07/25   

이제 보니 이 글은, 157번 게시물에 달아 준 최지 덧글의 변주곡이구나...
왜 그걸 이제 깨달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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