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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 article 2007/02/21  
         name          이대
subject 언젠가 꼭 쓰고자 했던 일본인 소설가 ‘장편소’이야기

언젠가 꼭 쓰고자 했던 일본인 소설가 ‘장편소’이야기


학교 박물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의 일이다.
내가 일했던 학교 박물관에서는 1, 2, 3층에 마련된 상설 전시실에서의 상설 전시 말고도 몇 달에 한 번씩 1층부터 지하 1층으로 이어지는 특별 전시실에서 특별전을 열곤 했다.
일단 특별전이 기획되면 준비 단계에서부터 박물관 아르바이트생들은 평소보다 바빠지게 마련이다. 전시물들을 액자나 전시장(欌)에 하나하나 조심스레 넣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배치할 위치 역시도 학예사 선생님들을 도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전시의 설명과 홍보를 위한 각종 패널이나 리플렛들도 아르바이트생들이 전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특별전이 시작되면 박물관은 평소보다는 비교적 많은 관람객들로 북적이게 되고, 아직 살아 있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마련되는 특별전 때에는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관람객들이 적는 방명록도 놓여지므로, 특히 인포메이션 데스크를 근무지로 배정 받는 아르바이트생은 평소보다 조금은 더 정신 없는 일과를 보내게 된다.

사진가로서 들꽃 사진을 주로 찍는 한 교우의(아마 60학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들꽃 사진을 전시하는 특별전 기간이었다. 학교 교우이기도 하고 왜인지 모르게 학교 재단 측에서 부탁한ㅡ박물관 입장에서는 이름있는 사람도 아니고, 사진도 그리 특별할 것 없어 보여 별로 내키지 않는ㅡ전시이기도 했기 때문에 특별 전시실 입구에는 커다란 꽃화분들도 몇 개 놓여졌고 다른 특별전 때와는 달리 까만 옷을 입은 중장년의 관람객들이 많이 박물관을 찾아왔다.

특별전이 막바지에 이른 어느 주말이었다. 아침에 박물관 3층의 학예실로 가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개관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학예사 선생님이 조금은 장난기 섞인 말투로, 그래도 학교에서 교우분에게 마련해 준 전시인데 방명록에 적힌 이름이 몇 개 되지 않아서 걱정이라며 너희들(아르바이트생)이름이라도 더 적어 넣으라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웃으며 알겠다고 말하고는 무전기를 하나씩 챙겨서 각자의 근무지로 흩어졌다.

내가 배정받은 근무지는 1층의 인포메이션 데스크였다. 인포메이션 데스크는 가장 좋아하는 근무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근무지였다. 자리를 쉽사리 비울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책을 읽거나 다른 것을 하기에 다른 근무지보다 편하고 다른 근무지에서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심심하고 따분하면 찾아가는 사랑방과도 같은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할 때 가장 좋아하던 전시실은 3층의 현대미술 전시실이었다. 현대미술 전시실에는 작품의 특성상 장 안에 들어있지 않고 전시실에 그대로 내 놓여진 전시물들이 몇 개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 놓여진 작품들 가운데에는 꽤나 값나가는 작품도 있었기 때문에 3층 전시실은 별로 넓지 않은 면적임에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의 주의를 위해 아르바이트생이 두 명 배치된다. 그 덕분에 관람객도 별로 없고 또 가져온 책도 다 읽고 한 날이면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이야기를 나누며 남은 근무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 전시실에 전시된 전시물들은 왜 그리도 하나같이 재미있는 것인지, 일 년 가까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수십 번도 넘게 본 전시물들이지만 전시실을 걸으며 전시물을 찬찬히 주의 깊게 살펴보다 보면 근무 시간은 지루한 줄 모르고 지나가 버리곤 했다.
가장 피하고 싶었던 전시실은 1층의 백년사 전시실이었다. 일단 전시물들이 하나같이 따분한 것들뿐이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백년사 전시실에서도 전시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몇 주 지나지 않아 그만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근무지로 백년사 전시실이 당첨된 날이면 ‘뭐 별로 중요한 것도 없고 또 전부 장 안에 들어 있는데 뭐’하는 생각으로 나를 위안하며 인포메이션 데스크로 나와 그 곳의 아르바이트생과 이야기하며 하루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날,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앉아 나는 심심하기도 하고 해서 특별전의 관람객을 위한 그 방명록을 한 번 들적여 보았다. 나이 지긋한 관람객들이 많았던 때문인지 방명록에는 한자로 적힌 이름들이 많이 보였다. 그런데 학예사 선생님은 우리들 주말알바생 뿐 아니라 주중알바생들에게도 방명록에 관한 말을 했던 것인지 익숙한 이름들이 방명록 곳곳에 보였다. 그 가운데에는 자신의 별명인 토마토를 한자로 적어 둔(土馬土 라고) 친구도 있었고, 다른 알바생의 이름 한자를 나름대로 추측하여 적은 것인지 비교적 쉬운 한자로 적힌, 아는 이름들도 몇 개 있었다.
나도 방명록 한 면에 내 이름을 한자로 적어 넣었고 아빠와 엄마 이름도 한자연습 한다는 생각으로 적어 두었다. 그리고 또 뭘 적어 볼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백년사 전시실에서 근무하던 아르바이트생이 역시나 그 곳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인포메이션 데스크로 걸어 나왔다.

인권 보호 차원에서 그 아르바이트생을 아무 의미도 없는 이니셜 ‘A’ 라고 해 두자.
A는 백년사 기념관에서 걸어 나와 내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주중아르바이트생 누군가가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가져다 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잠깐 펼쳐 몇 페이지를 살펴보곤 금세 덮어 두었다.
나는 A에게 방명록을 들춰 보여주며 함께 ‘土馬土’같은 부분에서는 웃기도 하고 또 낄낄대며 몇 개의 그럴싸한 한자 이름을 만들어 내어 필체를 바꾸어 가며 적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장난치다가 흥미를 잃고 딴짓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A가 툭툭 치며 말했다.

“방명록에 이렇게 써 넣어도 모르겠지? 할아버지니까 일본 소설가는 잘 모를 것 아냐.”

그렇게 말하며 A가 가리킨 방명록에는 ‘장편소(長篇小)’라는 글자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나는 A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아 A의 얼굴과 長篇小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는 방명록만을 반복해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자기 앞의 책을 가리키며 A가 덧붙였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일본 작가니까 나이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 아냐.”
나는 그제서야 A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당황스러움이 나를 엄습했다.
A가 가리키고 있는 책의 표지에는,

[ 무라카미 하루키 長篇小說ㅡ ]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ㅡ ]

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적혀 있는 것을, A는 뒤의 한자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을 한자(일본어)그대로 적어 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하는 것처럼. 게다가 어쩐 일인지 우리 무라카미 하루키씨는 우리나라 이름에도 익숙한 ‘장’씨였던 것이다!
A는 때마침 적절하게도 ‘장’씨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을, 우리나라 이름처럼 보이도록 세 자까지만 방명록에 적고는 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가장 좋은 가정교육은 식사 시간에 음식을 식탁에 흘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이 흘린 음식을 못 본 척 하는 것이다.’라는 프랑스 속담이 있다.
나는 그 속담처럼 가정교육을 잘 받은 아이니만큼 A에게 그 실수를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가정교육을 잘 받다가 중간에 지겨워 치워 버리고 말았는지, 한참이 지난 지금 결국은 참지 못하고 이렇게 쓰고야 말았다. 정말 쓰고 싶어 혼났다.




만쥬 2007/02/22  delete

이야..이건 내 친구한테 길거리에 걸려있던 약국 간판(앞에는 한글로 약, 뒤에는 한자로 藥이라고 써져있었다)을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저거 읽어봐."
했더니 친구가 "약국" 이라고 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구나..
(가정교육 잘 받은 것과는 거리가 먼 나!)

만쥬 2007/02/22  delete

그리고 하루키의 '무슨' 장편소설이었는지, 그 책 제목이 궁금합니다!

참견자 2007/02/22  delete

상실의 시대, 라고 씌어있는데....

만쥬 2007/02/22  delete

어헉, 눈이 삐었나
3번이나 읽었는데도 <상실의 시대>는 못 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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